내가 하고 싶은 실험은 할 수 없었다 — 그래도 박사까지 간 이유

화공생명공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막연하게 생명공학 쪽 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포를 다루거나, 바이오 소재를 합성하거나, 뭔가 살아 있는 것을 연구하는 일. 대학원에 진학하면 내가 원하는 분야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자유롭게 실험을 설계하고, 스스로 방향을 개척해나가는 연구자의 삶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 기대를 품고 연구실 문을 열었다.

배정된 주제는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막상 입학하고 나니 현실은 달랐다. 배정된 과제는 촉매 연구였다. 생명공학과는 거리가 먼, 화학공학의 핵심 분야였다. 교수님의 기존 연구 방향, 정부 지원 과제의 범위, 연구실 인프라 — 이 모든 것이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실험을 할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크게 실망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도 있었다. 논문을 읽어도 흥미가 쉽게 생기지 않았고, 실험실에 앉아 있어도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학원이라는 공간은 분명히 내가 선택해서 들어왔는데, 정작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묘한 무력감을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연구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었다. 이미 대학원에 입학했고, 지도교수님과의 관계도 있었고, 석사를 중도에 그만두면 이후 진로가 막막해질 것 같았다. 그냥 버텨야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연구에서 나만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을까.

촉매에서 생명을 보기 시작했다

그 감정이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촉매 반응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분자 수준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하다 보니, 그것이 생명 현상과 연결되는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효소도 결국 생체 내 촉매다. 단백질이 특정 기질과 결합해 반응을 촉진하는 방식은, 내가 연구하는 무기 촉매가 표면에서 반응물을 활성화하는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언어가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원했던 분야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촉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연구가, 어느 순간 내 언어로 읽히기 시작했다. 흥미가 생기자 논문이 달리 읽혔다. 실험 결과가 달리 보였다. 같은 데이터인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구자가 주어진 주제 안에서 스스로의 질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박사과정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체감했다.

주어진 길 위에서도 자신의 질문을 만들 수 있다

결국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처음에 원했던 그 실험은 끝내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주어진 길 위에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이 연구자로서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석사에서 박사까지,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연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제약 속에서 찾아낸 나만의 질문들이 결국 논문이 됐다. 연구란 내가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실험실에 들어갔느냐보다, 그 안에서 어떤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냈느냐가 결국 연구자를 만든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대학원에 들어오려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못 하게 됐다고 해서 너무 일찍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처음의 기대와 다른 곳에 서 있다고 해서 그게 틀린 길은 아니다. 주어진 길 위에서도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의 길이 되어 있을 때가 온다. 학문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도 연구자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겪는 기대와 현실의 간극

내가 경험한 이 간극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대학원에 들어오는 많은 학생들이 비슷한 충격을 받는다. 학부 때 매력을 느꼈던 분야와 실제 배정된 연구 주제가 다른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교수님의 연구 방향, 연구비 과제의 범위, 기존 연구실 인프라 — 이런 것들이 학생 개인의 희망보다 먼저 연구 주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건 그 간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나는 처음에 실망으로 반응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실망 속에서도 계속 연구실에 나왔고, 논문을 읽었고, 실험을 했다.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순간 흥미의 씨앗을 만들어준다. 촉매와 생명현상의 연결점을 발견한 것도 그런 과정에서였다.

대학원 진학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지금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두고 싶다.

첫째, 원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님을 찾아가더라도, 그 연구실에서 내가 그 분야의 연구를 맡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연구실마다 진행 중인 과제가 있고, 신입 대학원생은 그 과제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원 전에 그 연구실의 현재 진행 과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해두는 것이 좋다.

둘째, 분야에 대한 흥미보다 연구하는 방식에 대한 흥미가 더 오래간다. 생명공학이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돌아보면 내가 진짜 좋아했던 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 방식의 흥미를 유지하는 한, 어떤 분야에서도 연구는 의미 있다.

셋째, 대학원은 혼자 하는 곳이 아니다. 주변 동료, 선배, 교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연구가 이루어진다. 좋은 연구실 문화가 좋은 연구를 만든다. 입학 전에 그 연구실 분위기를 최대한 파악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대학원생들이 어떤 표정으로 연구실을 다니고 있는지, 커피 한 잔을 핑계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이 글은 화학공학 박사 Peter Kim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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