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끔 그 기억이 떠오릅니다. 박사과정 3년 차였을 때, 과제 마감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매주 미팅마다 진도를 재촉하셨고, 저는 아직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합성 실험 프로토콜을 들고 후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저는 실험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왜 실험실에서 안전이 뒷전이 되는가
많은 연구자들이 “그냥 해왔으니까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실험을 합니다. 특히 학부 시절부터 비슷한 실험을 해온 대학원생들은 위험에 둔감해지기 쉽습니다. 고농도 산성 용액을 맨손으로 옮기거나, 환기가 불충분한 공간에서 유기용매를 다루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학생 개인의 부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구조적인 압박이 안전 불감증을 만들어냅니다. 과제 기한이 다가오면 지도교수님도, 선배도, 심지어 본인도 “지금은 그냥 빨리 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게 됩니다. 결과가 나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다음 단계가 없으면 논문이 없고, 논문이 없으면 졸업이 없다는 압박이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포닥이 된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한 가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안전 준비에 쓰는 시간 1주일이, 사고 수습에 쓰는 시간 수개월을 막아줍니다. 실험이 빠르게 진행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안전한 환경’이지, ‘빠른 시작’이 아닙니다.
과제 초반, 지금 당장 해야 할 안전 점검
새 과제를 시작하게 됐다면, 첫 주 안에 다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없다면, 첫 실험 전에 반드시 완료해야 합니다.
1. 사용할 화학물질 MSDS(물질안전보건자료) 전체 검토
MSDS는 귀찮은 서류가 아닙니다. 해당 물질의 인화점, 독성 노출 한계치(TLV), 응급처치 방법, 폐기 방법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처음 다루는 시약이라면 사용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이미 써봤던 시약이라도 새로운 농도나 반응 조건으로 다룬다면 다시 확인하는 게 맞습니다.
2. 실험 프로토콜의 위험 단계 사전 식별
실험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종이에 써보고, 각 단계 옆에 ‘이 단계에서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가’를 적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직접 해본 것처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 거죠. “이 단계에서 뭔가 흘리면 어떻게 되지?”를 미리 생각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반응 속도는 실제 사고 상황에서 차이가 납니다.

3. 긴급 대응 장비 위치 파악
실험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세 가지 위치를 외워야 합니다. 소화기, 세안대(eye wash station), 비상 샤워기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실험실에서 수개월을 지내고도 세안대 위치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 뭔가 튀었을 때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이미 늦습니다. 위치를 외우는 데 2분이면 충분합니다.
4. 보호 장비(PPE) 실제 착용 연습
장갑이 있어도 잘못 착용하면 소용없습니다. 실험복 소매가 장갑 위로 올라와 있어야 하는지,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지, 사용하는 시약에 맞는 장갑 소재인지(라텍스 vs. 니트릴 vs. 네오프렌) 확인해야 합니다. 보안경도 일반 안경 위에 착용이 되는 것인지 먼저 확인하세요. 형식적으로 끼고 시작하는 것과 실제로 보호받는 것은 다릅니다.
지도교수님이 재촉할 때,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
가장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관계 구조가 실험실에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묵묵히 따르다 사고가 나면 피해는 온전히 학생 몫입니다.
저는 당시에 한 가지 방법을 썼습니다. “이 단계에서 제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먼저 그것만 체크하고 내일 실험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못 한다’가 아니라, ‘준비를 마치고 하겠다’는 프레이밍입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이 차이를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안전 사고가 나면 과제 기한이고 뭐고 전부 멈춥니다. 사고 수습에 필요한 시간은 예방에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깁니다. 결국 빠르게 가려면, 안전하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몸이 있어야 연구도 있습니다
연구는 장기전입니다. 박사과정 5~6년, 포닥까지 더하면 10년 가까운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냅니다. 그 긴 시간을 버티고 계속 달려가려면 몸이 온전해야 합니다. 과제 하나, 논문 한 편을 위해 건강을 잃는 일은 어떤 기준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포닥이 된 지금도 저는 새 실험 전에 반드시 위험 요소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사 시절에 몇 번의 아찔한 경험이 그 습관을 만들어줬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은 아찔한 경험 없이 그 습관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과제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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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포닥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저자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저자의 경험: 이 글은 대학원 생활 중 직접 경험하면서 얻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